‘학이시습지불역열호’라는 일구절로써 그 위대한 존재를 요약하며
논어의 수천 어구를 대표하게 한 공부자는 심히 학습을 즐겨한 어른이었다.
부자(夫子)는 스스로의 말을 듣건대
자왈 십실지읍 필유충신 여구자언 불여구지호학야
(子曰 십실지읍 必有忠信 必有忠信 不如丘之好學也)라고.
호학(好學)은 공부자의 자임(自任)하는 특색이었다.
그리고 학업을 좋아한다 함은
필왈(必曰) 주역(周易)의 표지를 7-8번 체찬(替纂)하는 일만이 아니다.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 박사에게는 무용한 시간이 없었다 함도
호학의 일례거니와 참으로 호학하는 자는 서적에서 배울 뿐만 아니라,
무학한 농부와 노파에게서도 배울 것을 발견하며 능히 배워 내는 겸허한 위인이다.
선진국에 가 배울뿐더러 후진국으로 보이는 데서도 배울 것을 발견하며,
대선생에게서 배울뿐더러 불치하문(不恥下問)하는 자라야
가히 대성(大成)의 전당(殿堂)을 성취할 자이다.
기독신자는 본래 겸손이 저들의 생명이요, 겸허하여 호학하여야 할 사람들이다.
저들은 ‘스스로 아는 척하는 자는 아직 알아야 할 것도
채 다 알지 못하는 자이라’는 것을 배운 자들이다.
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체하는 자는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 있는 사람이 되리라”는 사도 바울의 교훈을 받은 자들이다.
다른 일에는 흑시 결함이 있다 하고 미숙한 것이 있다 할지라도
배우려는 겸허한 심사에 이르러서는 단연코 일대 특색을 발휘하여야 할 사람들이다.
아직 완성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장차 나타날 영광의 날을 향하여 뒤의 것을 잊고
앞의 푯대를 향하여 달음질하는 장성(長成)의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데 현하 조선 기독교도들의 실황은 어떠한가.
저들은 교파가 다르면 벌써 배울 길이 없고 가르칠 인연이 없지 않은가.
화석된 법규에 의하여 구속되고 약자의 억압에나 유효한
노회, 총회, 연회 등의 결의(決議)로써 인형(人形)의 춤을 추면서
한갓 완미고루(頑迷固陋)를 향하여 달음질하고 있지 않은가.
이는 결코 기독교 본연의 자태가 아니다.
돈독한 신자일수록 고집불통의 벽(癖)에 빠지는 이가 많다.
우리는 아직 천연한 인간으로 남아 있어 배울 수 있고 회개할 수 있고
성장할 유여(裕餘) 있는 겸허한 살림을 할 것이 기원이다.
원컨대 동맥경화병보다도 더 두려운 병,
우리 심령의 경화를 면케 하여 끝까지 부드럽고 만만한 심령,
배우고 자랄 수 있는 청년으로 두어 줍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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