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올봄에 서재 한 간을 지었다.
단 한 간을 증축한 것이니 조성(造成) 운운할 것도 없으나
우리 스스로의 의장(意匠)과 노력과 고심이 많이 들었으므로
그 성조(成造)의 감상만은 적지 않다. 첫째로 미(美)에 대한 무관심이다.
본래 뜻은 있으면서도 실현 못하던 건축을 이번에 성취한 것은
『창조의 생활』 김주항(金周恒) 씨의 잡석과 양회로 지은 주택에서
본을 보았고 힘을 얻음이 많았다. ‘그렇게 하여도 집이 된다면 나도’ 하는
생각이 난 것이다. 건축에 미를 표현함에는 예술적 재(才)와 물질적 부(富)를 요한다.
재도 부도 가지지 못한 자는 부득이 미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밖에 없었다.
오직 한 가지 미의 표현으로 용마루 남단에 추녀를 붙인 것은 목수의
전문적 기술로 인한 인습적인 버릇으로 주인 몰래 한 것이요,
주인 된 나의 매우 불만하게 아는 바이다. 우리는 실용적이면 그만이다.
돌로 지었으나 돌집이라기보다 석굴이라고 하는 평이 바른 연상(聯想)을 줄 것이다.
형(型)도 없고 식(式)도 따르지 않은 까닭이다. 창을 크게 하고 여러 개 만든 것은
일광과 공기를 넉넉히 받아들이고자 함이요, 출입구를 이중판으로 하고 유리창을
이중으로 한 것은 집안의 아이들 전쟁 소리, 동네의 과잉 라디오 소리,
유행가 곡조 등의 모든 세상의 음파를 거부하려는 심산이었으나
목적을 완전히 달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하늘에서 오는 것은 주는 대로 받고 인간에서 보내는 것은
모조리 거부하고자 하는 고집이 표현된 것이다.
시멘트와 모래를 1 대 3, 1 대 4의 비례로 섞는 것과 ‘샘무리’ ‘덴바’ 하는
용어 등도 신기하였거니와 창과 문을 짤 때의 고심초사는 우리에게
새 세계 하나를 발견케 하였다. 내가 양정학교에 봉직한 지 10년이언마는
우리 서재의 도어를 짜 보고서 비로소 학교 사무실의 도어(출입구)를 다시 보았고,
새로 보았고, 실상인즉 처음 본 셈이다.
그 ‘울게미’의 폭은 몇 촌, 광(廣)은 몇 촌, 문 전체의 고(高)와 폭(幅)은?
용재(用材)는 무엇? 하면서 더듬어 볼 때에 나는 학교 도어를 처음으로
받들어 열고 받들어 닫게 되었다.
그 문 한 짝에 든 금액과 공력과 고안과 애정을 짐작할 수 있게 된 까닭이다.
유리창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박물 준비실 유리창을 몇 번이나
열어 보고 닫아 보면서 홀로 미소를 금치 못하였다. 광선과 공기는 맘대로
들이되 음파와 먼지는 단연코 거절! 이렇게 생각하면서 경성 시내의 관아,
은행, 백화점 등의 유리창이 나의 흥미의 대상이 되었다.
성 같은 석벽 쌓기를 필하고 지붕을 만들 때에 또 한번 새로운 고안이 필요하였다.
역학적 지식이 요구되었다. 가장 적은 재목으로 가장 유효하게 버티기 위하여.
이로 인하여 노방에서 벽돌 쌓는 건축장에 멈춰 서기도 몇 번.
우리는 신기한 것과 감사한 것과 찬송의 감을 억제할 수 없었다.
시간 여유 있는 이는 누구나 일생에 한 번씩 단 한 간이라도
자기 손으로 짓고 살 것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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